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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민주인권기념관]

스콜라란 2019. 9. 26. 11:02



광화문에서 서울역 앞을 지나 용산으로 내려가던 중

남영동 대공분실(현, 민주인권기념관)에 들렀다.

서울 안에서 꼭 가봐야할 곳의 리스트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나에게는 이곳이었다.


이하 내용 중 파란색 글씨

남영동대공분실 탐방 안내책자의 내용을

그대로 발췌한 부분이다.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를 다시 찾게끔 하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의 양성화는

후대에게 좋은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유럽에서 내가 직접 보고 느낀 대표적인 곳은

독일 베를린 시내에 있는 추모공간과 장벽이었다.


죽음, 공포와 관련된 기억을 덮지 말고

세상 밖으로 내놓는 것도 관광정책이 되어야 한다.





건물 5층 세로로 긴 창에 붉은 색을 입혀두었는데

지금의 기획전시 중 일부이다.

저 곳이 가장 가슴 저미는 곳이기에 더 눈에 들어온다.





1976년에 준공된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원래 5층 건물이었는데

1983년 2개 층이 증축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7층 건물이 된다.

(중략)

이 건물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 중 한 명으로 알려진

김수근의 작품이다. 김수근은 516쿠데타의 핵심이었던 

김종필과 친분을 쌓으면서 박정희 군사정권과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많은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한 건축가이다. 워커힐(1961), 자유센터와 

타워호텔(1963), 세운상가(1966),

여의도종합개발 계획(1967), 올림픽주경기장(1976),

올림픽 체조, 사이클, 수영경기장(1984), 

서울지방법원 청사(1984)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김수근은 자신이 사용했던 '공간' 사옥과 같이 

검은색 벽돌을 활용하여 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었다.

(중략)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처음부터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민주인사나 

학생들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오히려 그에 충실하게 설계된 건물이다.

(중략)

당시 조사실(고문실)이 있던 5층의 창문 구조가

다른 층의 창문과 확연히 다르다는 걸 쉽게 발견하게 된다.

고문을 받아 고통에 못 이겨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역할과 더불어

밖을 손쉽게 내다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도록 한 

그 치밀함에 보는 이들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건축가 김수근은 미래를 설계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그 뛰어난 재주나 전문성조차 한낱 독재권력을 옹호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건물입구 벽 아래 부분에 동판으로 새겨진 

'정초(定礎)' 표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동판은 1976년 당시 이 건물을 지은 책임자가 

'내무부장관 김치열'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김치열은 일제 강점기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검사를 지낸 친일파였지만,

해방 이후 처벌되기는커녕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승승장구하여 

서울지검장(1958)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1960년 419혁명 직후 315부정선거를 

'가담 내지 방조묵인'했다는 이유로 해임되면서

한 때 시련을 겪기도 하지만, 

이후 박정희의 516쿠데타를 지지하면서 재기한 후

1970년에는 중앙정보부 차장에 임명되며 승승장구한다.

김치열은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있던 1973년에는 

남산에 끌려가 고문을 받다 숨진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를 간첩으로 몰아 

"간첩 사실을 자백한 후 죄책감에 자살한 것"이라고

거짓 발표한 당사자였으며, 검찰총장 시절에는 

박정희 유신독재의 대표적인 인권유린과 

조작사건의 하나인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연행된

8명이 '사법살인'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사건 수사와 재판을 총괄하는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출세한 김치열은 내무부장관이 되어 

대표적인 고문기관, 용공조작기관인

남영동 대공분실을 짓는 책임자 역할까지 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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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서 잠시 원형계단을 보게 되었다.



뒷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조사실이 있는 5층에만 서는

엘리베이터나 5층으로만 통하는 나선형 계단을 통해

조사실로 올라가게 된다.

특히 고개를 숙인 채 쇠로 만들어진 나선형 계단을 

오르게 되면 방향감각조차 상실하게 되고, 

쿵쿵 올리면 들리는 쇠계단 소리는

두려움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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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층 조사실로 바로 올라갔는데

이곳에서 같이 온 친구가 힘들어 해서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5층은 15개의 조사실 중 2개를 제외하고는

똑같은 구조의 '조사실'로 들어차 있는데

각 방은 4.09평 공간에 책상과 의자, 

침대, 욕조, 변기가 설치되어 있다.

설치된 가구들은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바닥에 고정되어 있다.

각 방의 창문은 폭이 좁고, 위아래로 긴 

2개의 창문만이 이중창으로 나 있어

밖을 내다보기도, 비명소리가 새어나오기도 

어렵게 장치되어 있다.

(중략)

15개의 조사실이 서로 대각선으로 마주보게 

설계되어 있는 5층은 여러명이 함께 잡혀온 경우에도 

일절 서로 소통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곳에 일단 잡혀오면 나갈 때까지 

각각의 좁은 조사실을 벗어날 수 없는데.

그곳에서 식사도 하고, 잠도 자고 대소변도 보면서 

물고문, 전기고문을 비롯한 온갖 고문을 감내해야 했다.





515호실 기획 전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1985년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가한 

대표적인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그 이근안이 사용한 물고문과 전기고문은

그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당시 대표적인 고문기술자로 불리던

노덕술의 고문기술이 박처원(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당시 대공담당 치안감)을 통해

계승발전된 결과물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던 그 고문기술이 

해방과 함께 근절되기는커녕 오히려 진화를 거듭하면서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군사정권으로 이어져 

독재권력을 비호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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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열사가 스러져 간 509호실만이 물고문을 위한 

욕조까지 갖춘 8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이 전기고문까지 당한 

515호실을 비롯한 나머지 조사실은 몇 차례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이제는

애석하게도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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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에는 박종철군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박종철기념관'이 2008년부터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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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주황색 욕조타일만 봐도

생각이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고문장면을 비롯한 조사실의 일상은 CCTV를 통해

감시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본관 3층 과정실에서 모든 방을 지켜볼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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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기념관으로 변모한 옛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내 모든 설명에 영어안내가 꼭 필요한 것 같다.


우리가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이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