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적(왕릉·원·묘)

경기 화성| 조선 융릉(사도세자와 현경왕후)과 건릉(22대 정조와 효의왕후) (사적 206호)

스콜라란 2018. 7. 18. 17:23


수원 영통에서 부터 43번 도로를 따라서 안녕IC를 지나

빠르게 진입할 수 있는 융릉과 건릉(융건릉)은

내가 초중고등학교를 수원에서 다닌 탓에

단골, 그러나 맥빠지는 소풍장소로 더 기억에 남는다.


안녕IC를 지나 만년제교차로에서 바로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어쩌다 그냥 지나치고, 그 다음(수기지하차도)에 나와서

융건릉을 정면에 두고 진입하였다.

일대가 너무 삭막하게 개발되어 있어서 보기 좋지는 않았다. 




대단히 뜨거운 초복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조선왕릉 탐방을 완수해야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걸어 다녔다.

주변의 개발로 인해서 능역이 섬처럼 되어가는 것이 아쉬웠다.




초입에 바로 역사문화관과 재실이 마주하고 있다.

역사문화관은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없었다.

우선 우측의 융릉으로 이동하였다.









언덕에서 내려오면 멋진 나무들 아래에 풀밭이 펼쳐지는데 

웃음이 나왔다.

10대의 아이들을 강제성 띤 소풍이라는 명목 하에 

이곳까지 끌고와서 바로 이곳에서 풀어주었는데

그 어린 아이들에게는 정말 짜증나고, 할 것 없는 소풍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어릴 때 생각이 나서 혼자 피식거리고 웃었다.




이 다리는 금천교가 아니라 농교일 뿐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매우 안타까운 인물, 사도세자(1735~62)의 능이다.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22대 정조의 생부.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였고, 사도의 죽음에 연루된 자들에게는 피바람이 불었다.

아들 정조는 왕으로 즉위하면서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올렸고,

1899년 장조의황제로 추존되어 융릉이라는 능호를 얻게 되었다.





융릉과 옆에 있는 아들의 능인 건릉 모두

가장 뚜렷한 특징은 향어로 좌우로 박석이 넓게 깔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여름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은 내 개인적인 감상인데

융릉과 건릉 모두 홍살문, 정자각, 능이 일직선으로 위치하지 않았다.

또한 융릉의 경우 정자각과 비각 사이가 유난히 떨어져 있었다.








수라간의 그늘에 잠시 앉아 뜨거운 바람을 쐰 후

아래에 있는 곤신지를 둘러보았다.

곤신지는 왕릉에서 보기 드문 원형의 연못이라고 한다.











반대로 열심히 걸어 건릉으로 가는 길에는

소나무숲이 끝나면서 참나무숲이 펼쳐지는 것이 특징이다.






건릉 또한 향어로 주변으로 박석이 넓게 깔려있다.








건릉에서 내려와서 두 능의 사이에 있는 길로 걸었는데

나무다리 아래에서 고라니를 보게 되었다.

나는 나대로 놀랐고, 고라니도 놀라서 급히 달아나는 소리에

내 가슴이 순간 철렁했다.

주변 개발로 숲이 많이 없어지는 것 같은데 

그래도 작은 숲속에 저런 생명체가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재실 옆, 내가 좋아하는 신발털이개로 

신발과 상하체의 모든 먼지를 털어냈다.

마지막으로 재실에 들어가 향나무와 개비자나무를 감상하는 것으로 마무리...



아직도 수원 공군비행장이 예전과 같은 것인지, 

아니면 훈련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전투기의 굉음이 자주 들려왔다.




향나무 뒤의 개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504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