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적(왕릉·원·묘)

경기 양주| 조선 권율장군묘 (경기도기념물 2호)

스콜라란 2018. 4. 10. 22:52


[아이폰6 카메라로 기록을 남김]




장흥계곡 초입에 있는 권율장군묘로 바로 들어가는 대문은 닫혀있었고,

옆의 장욱진미술관 위쪽에서는 들어갈 수 있었다.






재실 옆으로 꽤 높은 곳에 묘가 위치하고 있다.





이 입구가 닫혀있어서 담벼락 옆으로 가서 입구를 보았다.

어떤 묘가 권율장군의 묘인지 확인하기 위해 설명을 읽어보고 왔다.







권율(1537-99)장군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면서 명장이었다.

안동 권씨인 권율은 선조 15년(1582)에 문과에 급재하여 예조정랑, 호조정랑 등의 

벼슬을 거쳤고, 55세에는 의주목사로 부임하여 북방의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중에는 전라좌도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1천여명의 군사를 모아서 충청도 금산의 이치(배티고개)에서 

전주로 진격하는 1만여 왜군을 대파하였다고 한다.

이 공로로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고, 한양의 수복을 위해서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성에 진을 치고 왜군이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이후 1593년 2월에는 서울을 회복하려고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겨

2,800명의 순사로 3만의 왜군을 물리치는 대첩을 올렸다.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전주, 한산도, 행주)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었다.

행주대첩 후 장군은 전군을 지휘하는 도원수가 되었고,

선조 29년(1596)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선조 32년(1599)에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나라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영의정으로 관직을 높혔고,

선조 37년(1604)에 선무공신 1등에 영가부원군으로 봉하고, 충장의 시호를 내렸다.


 



[Daum백과] 권율장군묘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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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묘역 전체는 1971년과 1999년의 정화사업으로 단장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공신 또는 훌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다.

기존의 신도비는 비문이 닳아 없어져서

철종 12년(1816)에 권율의 후손들에 의해 새로 건립되었다(비각 아래의 신도비).




승전비




묘 바로 앞까지 가볼 수 있는 계단길이 잘 되어 있었다.



3단 중 제일 아래의 나란히 있는 3개의 묘 중 가운데가 권율장군의 묘이다.

왼ㅉ고은 전부인 창녕 조씨, 오른쪽은 후부인 죽산 박씨가 안장되었다.

위에는 형, 제일 위에는 부친의 묘가 있다.



권율장군의 묘역은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묘역구조를 비교적 충실히 따른 것으로

묘비, 상석, 향로석이 각 1기씩, 그리고 무덤의 표시인 망주석과 

묘를 수호하기 위한 동자석과 문인석이 각 1쌍이 있다.








다음에 가시거리가 멀리까기 확보되는 맑은 날에는

행주산성 아래에서 국수만 먹지말고, 행주대첩의 격전지였던 행주산성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