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적(왕릉·원·묘)

경기 고양| 고려 공양왕릉(34대 마지막 왕) (사적 191호)

스콜라란 2018. 3. 24. 22:39

 

 

 

작년 봄에 경기도 연천군을 드라이브 하다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을 둘러본 이후에 왕릉/원/묘에 대한 블로깅을 시작했었다.

 

이번에는 이른 점심을 먹고 드라이브를 하다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1345-1394년, 고려 34대 왕)의 능에 가보았다.

 

신라가 고려로 이어지고, 고려가 조선으로 이어질 때의

불행한 시기를 거친 왕들의 무덤을 모두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은 탓에

공양왕릉도 신라의 경순왕릉처럼 제대로 보호받지 못해 보였다.

 

  

 

 

 

 

도로변의 이정표를 제외하고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이

샛길을 따라 들어갔다.

 

 

 

 

 

별도의 주차장은 없었고, 한켠에 차를 주차하고 보니

무슨 누리길 등의 푯말이 보였는데

이런 곳을 혼자 걸어다니다가 뭔일이 나도 아무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둘레길 유행도 좋지만 현실성 있는 곳에만 지정을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낮은 녹색 펜스 너머에 공양왕에 대한 얘기가 적혀 있는데

글 중에서 이 동네 너머의 일산 식사지구에 대한 명칭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

동국대학병원 뒤로 아파트 위주의 주거단지가 개발이 된 곳이다.

 

 

 

 

[ 전문 발췌 ]

 

공양왕은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제20대 신종의 6대손인 왕요를 찾아 왕위를 맡긴다.

마흔 다섯이었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평생 동안 먹는 것, 입는 것이 풍족했고 시중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 나이에 왜 내가 이런 큰일을 맡아야 한단 말인가!"

결국, 그는 2년 8개월 만에 고려가 아닌 조선의 왕 이성계에게 왕의 자리를 넘기게 된다.

공양왕은 이성계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을 예감하고

밤을 틈타 송도개성의 궁궐을 탈출해 무작정 남쪽으로 내달렸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사방이 캄캄해졌을 때 산 저쪽에 불빛이 하나 보였다.

어슴푸레한 그곳을 살펴보니 절이었다.

문을 두드리니 한 스님이 나와 물끄러미 왕의 행색을 살피더니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어찌하여 천하의 주인이 집도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는지요?"

하지만 쫓기는 임금을 숨겨 주었다가는 자칫 화를 입을 수도 있어 스님은 공양왕에게

"저희 절은 위험하니 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한 누각에 가 계시면

저희들이 매일 수라를 갖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였고

공양왕은 그 누각으로 가 절(사)에서 날라다 주는 음식(식)으로 연명하였다.

이로 인해 식사라는 명칭이 유래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양왕의 모습이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그 후 왕이 평소에 귀여워하던 청삽살개가 어느 연못 앞에서 자꾸 짖다 돌연 물속으로 뛰어들어 빠져 죽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사람들이 못의 물을 퍼내어 보니 옥새를 품은 왕이 왕비와 함께 죽어있었다.

비통에 잠긴 친족들은 연못 뒤에 조그마한 봉분을 만들어 왕의 시신을 안정하였다.

그 후 이곳은 왕릉골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왕릉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개모양의 석상이 있는데

이는 죽음으로 왕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린 충견 삽살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고려의 마자막 왕 공양왕의 왜소하고 소박한 능은 국운이 다한 고려왕조의 비애를 느끼게 한다.

 

 

 

 

 

 

 

 

붉은색 펜스 안이 공양왕과 왕비의 능역이다.

 

 

 

 

 

 

 

 

 

 

왕릉 앞 일대는 비닐하우스로 둘러져있고, 도로변의 차소음도 계속 들려왔다.

 

 

 

 

 

 

 

 

 

더 운전을 해서 고려 31대 왕 공민왕 재위 중 명장이었던

최영장군의 묘를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