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은 주소만 들고 찾아갔습니다.
사실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역사 공부를 전혀 안했습니다.
대학 때 혼자서 역사책을 읽은 것 외에는 특별한 지식도 없습니다.
요즘은 역사 왜곡이 많아서 관심을 좀 가지게 됩니다.
다른 나라와 다른 나라 사람들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나라 말만 하겠습니다.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는 정신대 위안부를 자발적인 매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화여대의 김활란 박사는 정신대 위안부 참여를 부추겼습니다.
일제의 강압에 의했다하더라도 사실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은 친일파 김용주의 후손입니다.
이것도 팩트입니다.
친일과 관련된 위의 민감한 팩트에 대해서 생각나는데로 예를 들어봤습니다.
위와 같은 팩트들은 모두 일제식민지로 인한 결과이며,
해방 후에 식민지 동조 세력에 대한 제거/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이나 지배당했던 우리나 모두 역사에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국권을 지키지 못했던 억울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지라도 그 팩트(Fact)는 사실로 남아야만 합니다.
앞선 부정적인 팩트와는 달리 긍정적인 팩트를 남기고 순국하신
분들은 역사로서 기록하고 그 정신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1905년 11월 18일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하려는 목적의 을사조약(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체결됩니다.
을사늑약에 찬성한 5명을 을사오적이라고도 합니다.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1907년
세계평화를 위하여 44개국이 네델란드의 헤이그에 모여서 만국평화회의를 개최합니다.
3차 회의는 1차 세계대전으로 무산되고,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UN이 결성됩니다.
만국평화회의는 UN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만국평화회의에 알리고자
2명의 한국인이 고종황제의 신임장을 가지고, 부산에서 배로 출발하여
러시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준(1859~1907), 이상설(1870~1917).
을사늑약으로 러시아 공관이 폐쇄된 상태에서도 러시아에서 외교적 활동을 해오던 외교관
이위종(1886~ ? )은 이준, 이상설과 합류하여 러시아 횡단열차를 타고 헤이그에 도착합니다.
당시에는 프랑스어가 공용어였으며 다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주 러시아공사
이범진의 둘째 아들)이 이준과 이상설의 주장을 통역하여 전달하였습니다.
헤이그 차이나타운 밖으로 아주 작게 보이는 이준열사 기념관 태극기
3인은 이곳 드용(De Jong) 호텔에 머물며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일본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의 출입이 안되자 회의장 앞에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한국인 노부부가 이 건물을 소유하여 이준열사 기념관으로 운영합니다.
암스텔담에 거주하시는 두 분이 매일 출근하여 많은 자료를 관리 및 보존하고 있습니다.
존경합니다!
이준 열사 흉상
고종 황제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한참 진행 중인 7월 14일 저녁 7시에 이준열사가 순국하였습니다.
일본외교관 하야시는 바로 일본으로 돌아가 이준이 자살하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팩트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자연사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죽음의 원인에 대한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독립운동 중 순국하였다는 팩트만 남은 것입니다.
자살이라는 말은 일본의 주장입니다.
일본의 주장을 의심할 만한 근거는 이렇습니다.
(1) 만국평화회의 일정이 많이 남았는데, 그래서 할 일이 더 있는데 왜 자살하겠는가?
(2) 7월 14일 당시는 이위종이 잠시 러시아에 도움을 청하러 간 시간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중요 인물들과 친분이 있는 이위종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
이위종이 다시 돌아오면 희망적인 메시지가 있을 수 있는데 자살했겠는가?
(3) 기독교인인 이준이 교리에 어긋나는 자살을 선택하겠는가?
안타까운 점은 포털사이트에서 이준의 이름을 검색하면
자결 등의 단어가 나옵니다. 팩트가 아닌 것이 버젓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상설이 7월 14일에 호텔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팩트입니다.
그가 당시에 어디에 있었는지 밝혀진 것도 없습니다.
이상설은 죽을 때까지 이준의 죽음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위종은 당시 외제 고급의류와 소품을 지녔던 멋쟁이였으며,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 모릅니다. 러시아 여성과 결혼했으며
이위종의 딸은 자신의 아버지를 한국의 프린스(전주 이씨 후손)로 알고 있습니다.
1907년 7월 14일, 대낮처럼 밝은 유럽의 저녁 7시에 이준은
이 호텔의 방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순국하였습니다.
열사의 유해는 헤이그 공동묘지에 우선 안장되었고,
1963년 고국으로 떠나 지금까지 서울 수유리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이준 열사 약력 (기념과 자료집 발췌)
1859.12.18.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
1895. 우리나라 최초의 한성법관 양성소(현 서울법대 전신) 졸업
1896. 한성재판소 검사보, 상동교회 청년회장
1898.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부 졸업
1904. 대한 보안회 도층무로서 일본의 황무지 탈취음모 분쇄 / 대한적십자회 회장
/ 공진회 회장으로서 일본에 대항하다가 미움을 사서 황주철도에 6개월 유배생활
1905.11.18. 을사늑약 체결 / 만국청년회 회장(YMCA)으로 국제친선운동 전개
/ 국민교육회 회장으로 교육사업 매진 / 오성학교 설립(광신상업, 건국대 전신)
/ 헌정연구회 회장 / 평리원 검사 / 특별법원 검사
1907. 국채보상협회 회장 / 헤이그 밀사(이준, 이상설, 이위종)
/ 7월14일 드용 호텔에서 순국
이후
1909.10.26. 안중근 의사 중국 하얼빈에서 히토 히로부미(이등박문) 처단
1910. 한일합병
1919.3.1. 독립운동 발발
1945.8.15. 조국 광복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1963. 유해봉환하여 서울 수유리에 안장
이준열사 기념관 주소 : Wagenstraat 124, 2512 BA Den Haag
(헤이그 중앙역에서 20분 정도 걸으면 됩니다.)
개관시간 : 월금 10:30~17:30 / 토 11:00~16:00
홈페이지 : www.yijunpeacemuseum.com
역사의 한 순간을 생생히 느끼고 온 여행이었습니다.
1층에서 벨을 누른 후 2층으로 올라가 관람료(5유로)를 내고
천천히 보고 있는데 이준아카데미 원장님(남)께서 차를 한 잔 내주셨습니다.
3층에서 자료를 보고 있을 때는 이곳을 운영하시는 관장님(여)께서 올라오셨습니다.
1시간이나 저에게 설명을 해주셨고, 저도 궁금한 내용을 물어봤습니다.
관장님의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일본 미워할 것 없다. 우리가 약하니까 당한거다. 우리가 노력해서 힘을 키우자.'
역사를 어떻게 대하고,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배울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친일파 후손들에게 화가 나지만 더 영리하게 그들을 대해야 겠습니다.
친일파 정치인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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